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시작하는가. 나는 이 질문을 연역과 귀납으로 풀어 본다.
둘은 하는 일이 다르다
| 재료 | 주는 것 | 못 주는 것 | |
|---|---|---|---|
| 연역 | 이미 가진 정보 | 확실함 —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 | 새 정보. 전제 안에 있던 걸 꺼낼 뿐 |
| 귀납 | 쌓인 관찰 | 새로움 — 없던 규칙이 생김 | 확실함. 틀릴 수 있음 |
확실함은 연역에서 오고, 새로움은 귀납에서 온다. 둘 다를 한 번에 주는 추론은 없다고 본다.
0에서 시작하는 연역은 없다
연역은 전제가 있어야 돈다. 전제는 셋 중 하나에서 온다. 관찰했거나, 정의했거나, 일단 참이라고 가정했거나. 그러니 연역으로 시작한다는 건 무에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다. 지금 가진 걸로 시작한다는 뜻이다.
정보가 0일 때는 귀납을 못 한다. 쌓인 관찰이 없으니까. 이때 할 수 있는 건 하나다. 가진 정보를 조합해서 “이럴 것이다”를 세운다. 이게 연역이고, 결과물은 가설이다.
예를 들면 이렇다.
이 문장은 연역이다. 전제가 참이면 필연이다. 문제는 전제다. “여기에 사려는 사람이 있다”가 참인지는 연역으로 알 수 없다. 그건 봐야 안다.
그래서 찔러 본다
가설을 들고 바깥을 작게 건드린다. 소개 페이지 하나, 광고비 몇만 원, 클릭 백 번. 크게 걸지 않는다. 목적이 버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.
찔러 본 결과가 첫 관찰이다. 여기서부터 귀납의 재료가 생긴다.
쌓이면 귀납이 돈다
찌를 때마다 두 가지를 적는다. 찌르기 전에 본 숫자, 그리고 실제 결과. 열 번, 스무 번 쌓이면 어느 숫자가 진짜로 맞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한다. 처음에 찍었던 기준을 그걸로 고친다.
이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다. 전제 하나를 맞힐 확률이 면 넷이 다 맞을 확률은 다.
60%면 13%다. 80%로 올리면 41%다. 귀납이 하는 일은 이 숫자를 올리는 것이다. 가설을 더 좋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전제를 더 자주 맞히게 만드는 것. 둘은 다르다.
맞는 게 보이면 싣는다
여러 번 찔러서 반응이 온 자리가 생기면, 거기에 돈과 시간을 더 넣는다. 찌르기가 탐색이라면 이건 활용이다.
순서를 한 줄로 쓰면 이렇다.
끝이 처음으로 돌아간다. 실은 뒤에도 다시 찌른다.
둘의 비중은 바뀐다
처음에는 거의 전부 찌르기다. 아는 게 없으니 넓게 봐야 한다. 기록이 쌓일수록 싣는 쪽이 커진다.
다만 찌르기를 0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본다. 맞던 자리는 닫힌다. 남들이 들어오고 세상이 바뀐다. 싣기만 하는 쪽은 그 자리가 닫히는 날 갈 곳이 없다.
한쪽으로만 가면 생기는 일
연역만 하면 머릿속에서는 완벽해진다. 그런데 전제를 확인한 적이 없어서, 정교할수록 틀린 줄 모르고 멀리 간다.
귀납만 하면 이론 없이 아무 데나 찌른다. 뭘 찔러야 할지 몰라서 돈과 시간이 먼저 떨어진다.
나는 앞쪽으로 기울어 있다. 머릿속에서 끝까지 돌려 보고, 계산이 다 서야 움직이는 편이다. 그래서 내게 필요한 건 더 좋은 이론이 아니라 더 이른 찌르기라고 생각한다.
셋째도 있다
이미 일어난 일을 보고 “제일 그럴듯한 원인은 이것”이라고 찍는 것. 가추라고 부른다. 왜 안 팔렸는지, 왜 떴는지를 짐작할 때 쓴다. 빠르지만 제일 잘 틀린다. 반례가 나오면 바로 고쳐야 한다.
아직 모르는 것
얼마나 찌르고 언제 싣는 쪽으로 넘어가야 하는지, 그 경계를 나는 아직 모른다. 그리고 이 순서를 실제로 한 바퀴 돌려 본 적이 없다. 돌려 보고 틀린 데가 나오면 고칠 생각이다.
이어진 개념
↑ 콘센트 이론 — 여기서 찌르는 가설이 그 글의 콘센트다. 도 거기서 왔다
→ 자기 실험의 규칙 — 몸에 대고 같은 순서를 돌리는 것
→ 밖을 본다 — 전제는 머릿속에서 못 확인한다. 봐야 안다